지은이 : 쇼콜라
로맨티카 펴냄.

북토피아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로맨스소설 부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길래 책 정보를 살펴봤더니 수많은 서평이 달려있더랬다. 호기심에 구입하여 읽은 소설.
구입하고 e서재에서 펼쳐보니, 책 오른쪽 윗부분에 '19세 미만 구독금지'가 빨간마크로 선명하게도 페이지마다 달려있다. 오호라, 하고 읽어봤더니 과연...그 빨간색 마크가 괜히 달려있었던 건 아니로고.

이 책에서 묘사되는 씬은 러브씬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씬 자체를 빼면 책 내용의 2/3이 날아간다고 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자세하며, 어마어마한 양의 씬이 묘사되어 있다. 야하고 야시럽게. 강렬하다고 좋아하는 독자도 있었으나 글쎄, 이런 걸 강렬하다고 할 수 있던가? 자극수위가 강했는지 어쨌는지 처음 한두씬에서는 얼굴이 빨개졌으나 이후에는 심장을 움켜쥘 정도로 에로틱하단 느낌의 장면이 없었다. 구분하건데, 야한 것과 에로틱한 건 분명히 다르다. 단순히 키스만으로도 그간 두 주인공 사이에 누적된 성적 긴장에 폭발되어 더할나위 없이 에로틱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반면, 구체적인 묘사를 아무리 늘어놔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씬일 따름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의 씬은 에로틱하기보단 야한 쪽이었으나, 야하다고 바로 말하기에도 뭐한 것이, 주 내용이 바로 성담론을 다루었던 탓이다.


여자주인공 세희는 회사회식에서 술을 엄청나게 마시고는 어떤 남자와 함께 누운 침대에서 깨어난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도 보지못했고 기억조차 없는 남자는 원나잇스탠드이지 뭐, 라는 마음과 누굴까라는 호기심에서 방황한다. 세희의 회사에 새로 온 민승주라는 멋진 사람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세희이나, 알고보니 그녀의 원나잇스탠드 상대는 회사에서 거의 왕따취급받는 꾸질꾸질한 세진. 회사에 소문내겠다는 협박에 세진과 다시금 동침하게 된 세희이지만, 너무나 잘 맞는 속궁합과 성격 탓에 승주와 세진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고...

대략의 줄거리는 이런데, 읽기는 수월하게 읽었다. 그리고 읽은 후 고뇌했다. 내 취향의 로맨스소설이 아님이 분명한데, ㅇ ㅑ 설이나 신조 마유, 그 유명한 C작가(코니 메이슨)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는데, 왜 나는 그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기분 나쁨을 이 책에서는 안 느끼는 건가? 왜? 왜?

하룻밤에 걸친 고뇌에 재독 끝에 이유를 대략 분석해냈으니...
1. ㅇ ㅑ설이 아닌 이유 ; 시진님이 모 온라인 만화사이트에 연재하실 때 그 작품 보느라 결제하면서 성인만화란까지 보게 된 적이 있다. 그때 어떤 사람이 게시판에 올려놓은 ㅇ ㅑ설을 본 게 경험의 전부이긴 한데, 그때 딱 느낀 게 남자와 여자는 야하다고 느끼는 포인트가 다르구나, 하는 거였다. 구체적으로 설명키는 어렵지만 아무리 야하다해도 여자들이 쓰는 야X이를 비롯한 각종 씬들에서는 '어떻게 느끼는지'를 중점적으로 서술하는데 반해, 남자들 대상의 므흣한 소설은 구체적인 행위모습을 설명하는 쪽에 치중한다는 느낌이었다. 신음소리 등등을 포함하여. 그렇게 따져볼 때 이 작품이 남자들용 ㅇ ㅑ설이 아닌 이유는 분명하다. 다양한 씬들을 묘사할 지언정 언제나 '여주인공'의 감정과 묘사를 빼놓지 않았고, 여자들이 싫어하는 묘사들은 건너뛰고 지나간 것들이 많았으니까.

2. 신조 마유 등과의 차이점
신조 마유의 작품에서 가장 싫은 건 '안돼안돼요~'하면서 실은 '된다'고 말하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여주들과, 자신감에 카리스마라고 가장한 마쵸근성을 주렁주렁달고는 '안 되긴 뭐가 안 돼! 이렇게 원하면서!'라는 남주들이다. '네가 원하잖아'라는 핑계로 그 남주들은 강간에 성추행에 납치에 온갖 짓을 자행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신조 마유라는 작가는 '여성'으로서의 의식이란 걸 갖고나 있는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쇼콜라의 작품으로 돌아가자면, 초반에 역시 실수에서 협박으로 관계는 시작되고, 남주들의 명대사, '이렇게 원하면서'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후에 가면서는 여주인공, 세희의 의지가 나타난다. 처음 두번까지야 의지보다는 세린에게 이끌려 당(...)하는 세희지만, 그 후의 세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하며 적극성과 능동성을 보인다. 아마도 이 때문에, 내 불쾌감은 한결 엷어져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보수적인 사회에서 성에 관해서 여자가 언급하는 것은 금기에 가깝다. 작품 중 세희의 말마따나 놀아본 여자로 취급받기 딱 좋고, 그래서 여자들의 성담론은 억눌리고 거세되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에서는 그 부분을 건드려, 처음엔 억압되고 말해선 안 되기에 수동적이었던 세희가 꿈꿔왔던 욕망들 - 섹시한 가터벨트라든가 등등 - 을 능동적으로 시도해보는 쪽에 포커스를 맞추었고, 나중에는 그러한 '잘 맞음' 때문에 다른 외면 조건 좋은 근사한 남자와 세린을 놓고 고민하게 된다는 점이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대체로 로맨스 소설에선 여자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거나 남자주인공의 멋짐을 감상하며 바라보게 되는데, 이 경우에 여자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이 수월하면서 편했던 거다. 누구나 성적 환상은 있을 거고 - 싫더라도 사회에서 생산되어 소비되는 성적 이미지에 따른 환상 한두개 정도는 갖게 될 거라 생각하는데 - 그걸 말하고 자유롭게 공유하며 좋아하는 남자라면, 특히나 부부생활에서 성이 50%이상을 차지하는 게 사실이라면, 고민할 법 하지 않은가. 후반의 '마음이 통하지 않는' 관계에서는 세희가 고통스러웠다는 묘사까지 넣음으로서,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도 중요하다' 기타 등등의 주제의식 덕분에 섹스씬이 그렇게까지 튀지 않고 작품과 어우러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 센서도 건드리지 않았던 거고.


그렇다해도 별 세개 반 이상 주기는 힘든 작품이었는데, 아무리 몸으로 통하여(...) 사랑으로 간다지만 씬이 너무 많았고, 또 씬의 횟수와 강도도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룻밤에 몇번이고 어쩌고 하는데, 아무리 다음날 세희가 그 때문에 고생한다는 묘사가 있다 한들, 그 부분은 지나치게 환타지였다...협박이고 뭐고를 다 '남주가 여주를 사랑했기 때문에'라는 클리셰로 무마시켜버린 것도 그렇고, 그 멋진 팀장이 접근하고 나중에 헤어지는 빌미를 만든 것도 솔직히 별 동기가 없고(밀어넣었으면 끝이지 왜 데이트는 하는 건지 이해불가), 남주의 신분이 사실은 삐-------였다는 것도 별로였다.(처음 그대로 장래성 없는 평직원인채 두고, 팀장이 사실은 삐-였다고 하는 쪽이 더 좋았을 것 같다. 마지막 그 얘기로 신데렐라 이야기 세트를 완성해버려서)

너무 과장되지는 않았고(어떤 작가들을 보면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과하게 하는 게 눈에 보일 때가 있다. 이지환 등의 경우) 생활은 생활나름으로 펼쳐지지만, 뭐랄까...평균, 이상을 평하기가 아깝다. 아무리 성담론적이야기라 해도 한계,라는 게 있는 건데. 이번엔 작품의 주제와 묘사가 맞아떨어지긴 했으나,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그다지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그건, 완전히 신죠 마유일 것 같거던.

불량식품은 불량식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는 쪽으로 그 불량식품이 대표식품으로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존재해야 하고 존재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키는 하나, 문제는 항상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거지. 그 관점에서 보자면 편히 읽기 힘든 작품이기도 했다. 당장 서평의 수가 얼마인데. 쩝.
(뭐, 혹자는 장르소설 자체가 욕구해석의 측면이 있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또 장르소설이 예술성이나 작품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6/05/14 08:42 2006/05/14 08:42
Posted by 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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