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러니까, 나의 소비패턴은 이런 식이다.
라끄베르에서 연아라인인 아이스키스 주얼박스가 나왔단 말을 듣고 지름을 결심했다. 그랑프리 1호랑 2호가 있는데 퍼플 계열 말고 브라운 계열 질러야지, 립스틱은 발라봐야겠지만 연아 바이올렛 지르고 괜찮으면 연아 로즈도 질러볼까 이렇게 맘 먹고 x마트 개장 하자마자 졸래졸래 갔더랬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판매원도 자리에 없고. 혼자서 매장을 둘레둘레 돌다 주얼박스 발견. ...옆판매원에게 연아 주얼박스를 찾아달라고 하는데 어찌나 부끄럽던지. 역시 난 내놓고 팬질할 타입은 못됨. 아무튼 혼자 주얼박스를 발견하고, 한정판이라는데 당당히 매대에 있네? 하면서 아이섀도우를 발색해봤다.
음...색이...얼마 전 지른 보브의 칼라쏭 쉬즈골든베이지/돌스브라운과 비슷해뵌다?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 발색한 시점에서 비슷하단 생각이 들자 지름신은 저 멀리로 날아갔다. 연아 립틱도 안 들어왔어. 그냥 조용히 물러나왔다.


2.
교보문고에 들렀다. 딱히 무슨 책을 사겠단 생각은 없었는데, 돌아다니다 외서 코너에서 '니콜라' 시리즈 양장본을 발견하고 한권 집어든다(와, 겁나게 비싸다. 그넘의 환율! 그러나 꼬여드는 양장본의 유혹+영어공부해야지 하는 의지박약의 꼬드김. 니콜라 시리즈는 그닥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여행코너에선 빌브라이슨의 <발칙한 영국산책> 앞챕터를 보고 낄낄대다 집어든다. 영국의 지명 얘기 정말 와닿았음. 유럽편에선 파리 얘길 보고 폭소했는데, 두 권 다 지르기는 좀 그래서 일단 익숙한 영국 쪽부터 읽어보고 확장하기로 결정. 다른 책들 중 지르고 싶은 걸 눈도장 고루 찍어준 후 두 권을 계산한다. 두권 액수가 주얼박스 금액과 비슷하다.(각종 적립금 및 할인금 다 사용해서...)


3.
지른다고는 해도 대강의 예산이랄까, 가이드라인은 있고 그걸 심하게 넘어가며 지르는 적은 없다. 어디까지나, 가용예산 범위 안에서. 화장품이든 책이든 CD든 DVD든 간에 중복구매란 없다. 태지 환님 팬질할 때도 씨디 3장 구매 따윈 남의 나라 얘기였음. 어디까지나 한장, 끝. 그나마 태지 리마스터링 앨범(15주년 기념인가 그랬던거)이 전 앨범 다 소장하고 있는데도 지른 유일한 물품이었을 거다. 그 외에는 패키지가 달라지든 코멘트가 덧붙었든 양장본이 나오든 초판이든 간에 별 관심 없음. 화장품도 갖고 있는 색이라거나, 기능이 비슷하다고 느낀 순간 목록에서 제외된다. 그렇다고 금액이 남느냐? 그건 아니고. 못 지른 금액은 다른 품목(대개는 도서)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다. 책이란 아무리 가져도 부족하고 아무리 읽어도 부족하다는 내츄럴본책벌레. 게다가 콜렉터, 안 읽은 책이 아무리 많이 쌓여나가도 새로운 책에 욕심이 그득그득하다.


4.
집에 와서는 만화 몇권과 같이 지를, 아까 찍어놨던 몇권의 도서 인터넷 쇼핑 중. 디킨즈에 꽂혀서 물색 중인데 - 난 영국문학광, 빅토리아 시대광 - 어떤 책이 번역이 좋을까 고민하다보면 갑자기 짜증이 몰려오면서 원서 질러버려??? 하는 충동이 인다. 그러나, 내 영문 독서속도는 한글 독서속도에 현저히 못 미친다. 중요정보만 집어내는 경우가 많은 논문이야 대략적인 구조만 파악하면 대충 집어내서 그나마 속도가 좀 되는 편이다. 한글 논문들은 대개 한자어나 중복된 부분들이 있어 속도가 떨어지다보니 차이가 아주 크지는 않다, 정도? 그러나 영문논문은 문장, 단어 하나하나를 세심히 읽지 않으면 오독/오인하는 경우가 많아 대충 집어낸 후엔 그 부분을 다시 잘게 쪼개어 읽어봐야 한다. 고로 '정독' 기준이면 논문도 그리 빠르지는 않음. 반면 표현 하나하나를 음미해야 하는데다 속어 비중도 높은 소설류의 경우 영문 속독 능력이 바닥 수준이다. 처음 영국 건너가 해리포터 5권(...6권이었던가...?)을 읽을 때는 거진 열흘은 걸린 것 같다. 7편은 속독 수준으로 해치워서 2,3일로 줄었지만, 그건 내용 파악에 마음에 앞서 마구 달려나간 경우고. 어지간한 한국소설은 10권 이상도 하루에 해치우는 능력 - 후천적 속독능력 - 을 가진 인간이라, 뒤떨어지는 영문 독서속도에 본인 스스로 짜증을 내며 나가떨어지는 일이 많다. 차라리 국어 해독속도도 느리면 모르겠는데, 이쪽은 맘 먹고 속독하면 몇십초에 한장 읽는 것도 가능하다보니. 그런 한계를 뻔히 알고 있으니, 잠시 공상하던 영어원서의 꿈은 고이 접어지고, 다시 번역서 뭐가 좋은지 리뷰를 뚫어~져라~ 검색하며 살핀다. 주제에 번역 덜컹거리는 책은 못 읽어서. 제대로 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것도 아니면서 읽는 거에만 까다로워서는, 읽다가 걸리는 부분이 많은 한글 책들은 그대로 쳐박히는 경우도 많다. 번역이 어려운 작업이라는 건 일하면서 관련 서류들 번역해보면서 많이 느꼈지만, 그건 그거고, 만족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다시 디킨즈로 돌아간다. 어디 출판사가 젤 나을까나. (어린이용은 완전 제외. 청소년용 필요없음)


5.
그런데 왜 영어로 읽은 텍스트도 한국어로 기억이 될까? 해리포터 후반 시리즈만 더듬어봐도, 그 책은 영어로 읽어 온전히 영어로만 입력된 책이다. 그런데 거기에 나왔던 영어 표현, 단어 따위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줄거리고 뭐고 한글 - 그것도 줄거리 요약본 마냥 압축되고 뭉그러뜨린 한국어로 기억하고 있다. 한국어 책들은 쭉 읽어내려도 구절 몇몇은 상세히 기억나는데. 이것 역시 정보처리속도의 차이일까? 갈수록 길이 멀지 싶다. 멋드러지게 영어 몇구절쯤 기억하고, 생각하고, 읊어내리고 싶은데.  음, 영시도 읽어보고 싶은데 시는 한국어로도 취향이 아니라서(압축과 은유의 묘미를 무시해주고 길게 자세하게 설명해대는 문장과 감각의 소유자인 거다) 영시가 가능할까 모르겠다. 게다가 한글로 번역된 영시는, 어째 우리나라랑 감각이 다른 느낌. 번역시라 더 그런지도 모르나...


6.
미셀 투르니에와 알랭 드 보통을 시도해볼랬는데, 둘다 몇장 읽지 않아 소화불량에 걸린 양 더부룩하다. 나에겐 과도하게 많은 철학과, 사유와, 이미지와, 문장과, 단어를 한꺼번에 던져주는 느낌. 지금 이 포스팅처럼 번호 등으로 짧게 짧게 나눈 단락들도 그렇고. 뭔가, 끊임이 많되 사이사이 많은 걸 침묵 속에 던져둔 느낌이라 진도가 잘 나가는 작가들이 아니다. 프랑스 작가라 그런건지, 골라든 두 사람 스타일이 그런 건지.


7.
최근 가장 편하게 해치운 건 <궁녀>, <관아로 본 조선시대 생활사>, <조선국왕의 일생>, <조선공주실록>, <도서관 고양이 듀이>, 오스틴 여사의 명작들 정도인 것 같다. 소설은 버겁다면서 남들은 고리타분하다는 역사, 그것도 생활사를 우적우적 잘도 씹어먹는 건 정말로 취향 문제인지...현실이 버거워지면서 <중동의 역사><나쁜 사마리아인들><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저건 읽다가 분명 우울해져서 땅 팔 것 같거든. <밥벌이의 지겨움>을 몇장 읽고는 김훈 문체가 취향이 아님을 깨달았다. 만연체도 싫지만 단문체도 딱딱해. <밥벌이의 지겨움>은 그 제목 때문에 골라든 책이다. 밥벌이, 정말 지겨운 일이거든. 끈덕지기도 하고. <명심보감>은 어렸을 때 봤던 만화 명심보감이 젤 재미있었는데.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 두어편은 부족한 과학상식 덕에 이야기를 쫓아가다 헥헥거린다. 무시하고 읽어도 좋으련만 놓쳐버리는 건 또 마음에 안 들어서. 서점에서도 과학, 종교, 수학, 수험 섹션은 시크하게 통과해버리는 게다. 그리고 대개는 경제/경영, 자기개발, 연애 섹션도 쿨하게 무시당한다. 아, 이렇게나 치우친 글 읽기라니. 조선시대의 책벌레 선비들이 안다면 근본없는 독서라고 호통칠 것만 같다.


8.
영문과 친구가 오스틴 여사, 세익스피어옹, 디킨즈경이라면 경기를 일으켰는데. 예전에도 디킨즈 바람이 한번 불었는데 강하게 말려서 고작 <올리버 트위스트> 하나 지르고 끝났지. 셰익스피어옹은 원서로 좀 읽어보니 그 진저리에 처절히 동조했다. 이건 뭐, 이게 영어인지 라틴어인지 뭔지 알 수가 없는 수준. 그거 딱 몇줄 읽고 나면 오스틴 여사의 점잔 빼는 문장은 수려하게 읽힐 정도. 그러고보니 저 수북히 쌓인 책장 끝 어디엔가는 읽다가 만 <폼페이 최후의 날>이랑, <삼총사>랑, <걸리버 여행기>가 잠들어 있다는 기억이 희미하게...만약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이 내 위에 쌓인다면 난 압사할지도 몰라.

2009/11/07 01:36 2009/11/07 01:36
Posted by 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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